어느 지하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전시 《GRAVITY: 그 당연함에 대하여》는 지구상의 모든 존재를 끌어당기는 절대적인 법칙, '중력'의 속성에서 출발한다. 작가에게 대상을 깊이 관찰하고 화폭에 담아내는 행위는, 중력이 그러하듯 대상을 향해 작용하는 당연하고 거부할 수 없는 끌림과 닮아있다.
이번 작업에서 물을 가득 머금은 수채화와 과슈 물감은 중력을 따라 화면 아래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다. 작가의 손끝을 떠나 캔버스 위를 가로지르는 물의 궤적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인 동시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깊어지는 기억과 감정의 자국이다.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삶 역시 이러한 순리 안에 놓여 있다. 깊은 애정을 나누는 기쁨과 언젠가 맞이할 필연적인 이별은, 중력처럼 피할 수 없는 삶의 당연한 흐름이다. 캔버스 위에 수직으로 맺히는 물감의 흐름에는 이 아리고도 무거운 순리의 무게가 담겨 있다.
작가는 물감의 흘러내림이라는 시각적 언어를 통해 순리를 담담히 쫓아간다. 이번 전시가 중력이 만들어낸 궤적을 따라, 우리 삶을 이루는 당연한 순리와 그 안에 들어찬 순간들을 가만히 반추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주우러 가는 길
《주우러 가는 길》
학교에서는 산 타며 식물을 배웠고, 지금은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표본을 만들기 위해 식물은 살아있던 장소에서 일부 혹은 전체가 떨어져 나와야 합니다. 종이 위에 눌리고 라벨과 함께 과거로 못 박힙니다. 대신 그 과거를 들여다 보는 누군가는 표기된 위치와 시간, 채집자의 이름, 식물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던 그 식물의 모습을 더듬을 수 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표본에 기록된 위·경도 좌표로 그 식물의 원본을 찾아 다시 걸음하는 길은 불확실합니다. GPS의 측정 오차, 사람의 실수, 이미 원본 개체가 거의 죽었거나, 채집 이후 지형에 변화가 생긴 경우 등… 같은 자리에 그 식물이 그대로 자리할 때도 있고 아무리 헤매도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첫 개인전을 준비하며, 많은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그림을 만드는 일에 대해 고민하는 첫발을 내딛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번에 전시를 준비하며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흔적을 향해 걷는 허탈했거나 뿌듯했거나 초라했던 짧고 긴 길의 여정에 주목하려 합니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한국에서 식물을 채집한 표본으로 가장 초기 기록 중 하나를 뒤쫓아 부산항에 다녀왔습니다. 영국 왕립 식물원의 조수였던 찰스 윌포드(Charles Wilford)가 1859년경 한국의 거문도와 부산에 방문해 식물을 채집했다는 기록이 있고, 그의 표본들 중 내가 참조한 것은 그가 ‘Port Chusan’에서 채집했다고 기록한 머루의 한 종류(Vitis heyneana)입니다.
이재모피자가 먹고 싶은 친구와 어찌되었든 발로 산을 타야 할 것 같은 내가 만나 윌포드씨의 발자취를 어설프게 따라하는 여정이 있었습니다. 이미지와 좌표와 식물로 구성된 그의 표본에 다른 발걸음과 상념이 덧씌워진 160여 년의 간격이 있는 여정 속에서, 동일한 참조점(부산항의 머루)을 가졌지만 윌포드가 만든 기록과 내가 만든 기록은 다른 이름과 형태를 가집니다. 이 전시가 명확한 도착지를 제시하지 않더라도, 스치듯 떠오른 감각들이 각자의 기억 속에서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 내기를 바랍니다.
《주우러 가는 길》
작가: 최시은 @rooibos_yogurt
주최/주관: 최시은
협력: 갤러리 지하
후원: 경기도, 경기도미래세대재단
* 본 전시는 2025 경기청년 갭이어 프로그램 선정 및 지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25. 09. 29. - 25. 10. 05.
12:00 - 19:00
gallery JIHA, B1, 15, Seogang-ro 11-gil, Se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