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지하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크림색 서랍장 두 번째 서랍 안에 노랑, 보라, 하양, 파랑, 빨강의 꽃이 피었다. 빛이 들지 않는 이곳에서도 꽃은 핀다. 나는 이 꽃들과 너를 만나러 간다. 철교를 건너는 지하철 소리는 규칙적이고 창밖 버드나무의 초록은 점점 빨라진다. 햇살에 빛나는 강은 눈이 부시다.
오려진 사람은 오려져서 영원해져 버렸나. 계단이 계단을 오르고 어느새 깊은 밤이 녹아내린다. 오래전 비탈길 고양이는 자신의 길을 가고 지금 누군가에게는 여름, 바람이 불어온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물에서 발견하게 되는 잠재성을 회화의 언어로 시각화하여 작업하고 있다. 나의 시간, 타인의 시간, 친숙한 공간, 낯선 공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어떤 계기를 사물에 투영한다. 영화, 음악, 여행, 소설, 시는 끊임없이 짙은 현실과 미지의 세계로 이끌어 사고의 확장과 전환을 가능하게 하고 이것을 작업에 반영하기도 한다.
외주 작업을 하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먹고 사는것도 다 좋은데, 어느덧 작가의 정체성은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먹고 사는 걸 생각하니 내가 누구인지 잊었나보다.
원대한 작업을 꿈꾸다가 결론이 나왔다. 3D 모델러로서 사는 현재의 나도 나라는 것을.
언젠가 조형 작업에 쓰려고 틈틈히 만들어두었던 3D 데이터를 불러와 의도적으로 형태를 일그러트리면서 나는 변용 중첩된 이미지들을 창조해 나아갔다. 이미지는 다시 음영화를 거쳐 3D 부조 데이터를 구축해 출력하였다. 각 부조에 담긴 형상에 굳이 큰 의미를 담진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행위를 통해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다시금 상기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의 작업물들은 그저 그렇게 있어야만 한다. 마치 내가 지금 이 길 위에서 그냥 서있는 것처럼.
3D 그래픽 디자이너와 소조 작가를 겸하고 있으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대해 느낀 바를 작업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moonraeb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