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지하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서로 다른 두 세계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안식의 의미를 품으며 마음이 머무를 수 있는 곳을 향한 하나의 사유로 이어진다.
한지연
누구에게나 오롯이 숨을 고를 수 있는 안식처가 필요하다. 나에게 창작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불안을 다스리고 일상의 온기를 회복하는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내면의 쉼터를 화면에 짓는 것이다.
전통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의 맥락 속에서 오랜 세월 인간의 보편적 염원을 담은 길상(吉祥)의 의미에 주목했다. 과거 선조들이 다복한 삶을 기원하며 일상의 기물과 꽃, 과일 등의 길상물을 화폭에 담아 곁에 두고 완상했듯, 나의 작품 속에도 삶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순지 위에 분채를 올리는 전통 채색 기법을 바탕으로 현대 회화의 호흡에 맞춰 재료와 표현의 경계를 유연하게 확장하고자 한다. 전통적 상징성을 지닌 도상과 일상에서 포착한 친숙한 오늘날의 사물을 한 화면 안에 배치하여, 민화 특유의 다시점과 시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조형적 문법으로 재구성했다. 화면 속 안식처가 저마다의 삶을 지탱할 작은 위로를 건넬 수 있기를 바란다.
박세빈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곳을 상상한다. 꿈에서 비롯된 섬은 내면의 심상이 머무는 공간이자, 일상의 경계를 넘어 펼쳐지는 나만의 안식처이다. 그곳에는 현실에서 미처 다 이루지 못한 바람과 평온에 대한 염원이 깃들어 있다. 나는 이러한 상상의 풍경을 통해 보이지 않는 마음의 형상을 드러내고 나의 내면에서 시작된 세계가 누군가에게도 잠시 머물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무소유의 정신에서 비롯된 비움과 성찰은 안식의 의미를 또 다른 차원으로 이끈다. 소유와 집착을 덜어내는 일은 삶에서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헤아리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 이러한 사유를 바탕으로 선사의 형상에 외형 너머의 정신과 삶의 태도를 담아내고자 하였다. 그 가르침을 오늘의 시선으로 되새기며 정성을 다해 올리는 회화적 공양이기도 하다.
나에게 공필화는 이러한 사유를 가시적인 형상으로 옮기는 과정이다. 밑그림을 구상하고 선묘를 섬세하게 다듬는 일에서부터 천에 스며드는 물감의 성질을 따라 엷은 색을 여러 겹 쌓아 올리는 과정까지 정성을 기울인다. 한 번의 붓질로 완결되지 않는 화면은 색이 포개지고 스며드는 시간을 거쳐 서서히 깊이를 얻는다. 나는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선의 섬세함과 중첩된 색의 미묘한 변화를 좋아한다. 꿈의 심상과 선사의 정신은 서로 다른 형상으로 나타나지만 이를 화면에 옮기는 일에는 공들인 시간과 마음이 함께 깃들어 있다. 나에게 그림은 내면의 세계를 가꾸는 일인 동시에 그 안에 담긴 평온과 사유를 타인에게 전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축적된 색과 선 위에 나의 사유와 정성을 포개어 그림을 마주하는 이들에게 잠시 머물 수 있는 작은 안식처를 건네고자 한다.
(Who, What, When, Where & Why) I am
기술의 지속적인 발전으로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그만큼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표준화된 범주와 시스템, 제한된 표현 방식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정체성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유동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조차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글과 말로 표현되는 자아의 모습이나 통계적 범주 역시 한 사람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부여하는 이름과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때때로 자아에 대한 감각과 그 주도권을 잃기도 한다.
존 설의 ‘중국어 방’ 사고실험은 주어진 입력에 적절한 출력을 내놓는 행위가 과연 진정한 이해를 의미하는지 질문한다. 나는 여기에서 반대 방향의 질문을 떠올린다. 우리의 생각 역시 주변 환경으로부터 끊임없이 입력을 받아 형성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스스로와 구분해 온 하나의 시스템과 과연 얼마나 다른가.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 가운데 얼마만큼이 축적된 경험과 정보의 결과인지를 묻게 된다.
이 전시는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내가 지나온 시작점과 현재의 위치, 그리고 앞으로 향하게 될 지점을 따라가며 나를 형성해 온 여러 층위의 영향을 되짚는다. 그 과정에서 개인적인 성장의 경험을 다시 바라보고, 내가 무엇을 물려받았으며 무엇을 흡수했고 무엇을 스스로 선택해 구축해 왔는지를 살펴본다. 이는 하나의 명확한 자아를 규정하기보다,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는 과정과 흔적을 정리하는 시도이다.
전시는 세 개의 장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 장에서는 나의 사고방식과 자아감에 영향을 미쳤지만 스스로 통제할 수 없었던 외부적 조건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한 걸음 떨어진 제3자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바라본다. 두 번째 장에서는 환경과 개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소비와 사회화의 과정을 다룬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격리 기간과 겹쳤던 청소년기 초반의 경험에 주목한다. 고립된 환경에서 인터넷에 몰두하며 수많은 정보를 흡수했던 시간과 그 경험이 이후 세상을 인식하고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에 어떠한 흔적을 남겼는지를 돌아본다. 마지막 장에서는 그렇게 주어진 환경 안에서, 혹은 바로 그 환경으로 인해 내가 선택해 온 것들을 탐구한다.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순수한 자아를 찾아내는 일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무엇이 물려받은 것이고 무엇이 온전히 나의 선택인지 명확히 나누는 것 역시 어렵다. 정체성은 어딘가에 완성된 형태로 존재해 발견되는 것도, 외부와 단절된 채 독립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 사이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형성되고 변화한다.
따라서 이 전시는 나의 현재와 미래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나를 형성해 온 흔적을 되짚으며, 여전히 변화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과정에 가깝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가: 정수아 @stellasuachung
Saint Paul Preparatory Seoul
26. 09. 03. - 26. 09. 06.
12:00 - 19:00
gallery JIHA, B1, 15, Seogang-ro 11-gil, Se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