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지하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프랙탈 밸리는 끝없이 이어지는 패턴들로 이루어진, 조금은 신기하고 조금은 장난스러운 세계다. 가까이 보면 복잡한 수학 구조 같고, 멀리서 보면 거대한 블록 장난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무한 패턴의 골짜기 곳곳에는 작고 귀여운 생명들이 숨어 지내며 저마다의 모험을 펼친다.
이번 전시는 바로 이 상상의 공간을 탐험하는 하나의 여정이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프랙탈 구조 속에서, 만화 속 캐릭터 같은 작은 존재들이 자신만의 세계를 발견하고,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용감하게 새로운 공간에 발을 디딘다. 끝이 없을 것처럼 보이는 구조물의 틈새에서 피어난 작은 꽃과 그것을 발견한 꼬마 탐험가는 이 전시의 상징적인 장면이다. 여기에서 프랙탈은 어렵거나 무거운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만화처럼 친근한 방식으로 변주되며, 기하학적 패턴과 귀여운 상상력이 함께 어우러진 하나의 놀이터가 된다. 무한한 구조 속에서도 작은 존재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눈에 띄게 반짝인다.
무한한 패턴 속에서 작은 생명들이 살아 숨 쉬는 모습을 통해, 복잡한 세상 속에서도 우리의 일상에 자리한 작고 소중한 순간들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프랙탈’도, ‘만화’도 어려운 것이 아니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상상력의 세계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프랙탈 밸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무한 패턴 속 작은 모험이 곧 시작됩니다.”
주우러 가는 길
《주우러 가는 길》
학교에서는 산 타며 식물을 배웠고, 지금은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표본을 만들기 위해 식물은 살아있던 장소에서 일부 혹은 전체가 떨어져 나와야 합니다. 종이 위에 눌리고 라벨과 함께 과거로 못 박힙니다. 대신 그 과거를 들여다 보는 누군가는 표기된 위치와 시간, 채집자의 이름, 식물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던 그 식물의 모습을 더듬을 수 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표본에 기록된 위·경도 좌표로 그 식물의 원본을 찾아 다시 걸음하는 길은 불확실합니다. GPS의 측정 오차, 사람의 실수, 이미 원본 개체가 거의 죽었거나, 채집 이후 지형에 변화가 생긴 경우 등… 같은 자리에 그 식물이 그대로 자리할 때도 있고 아무리 헤매도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첫 개인전을 준비하며, 많은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그림을 만드는 일에 대해 고민하는 첫발을 내딛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번에 전시를 준비하며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흔적을 향해 걷는 허탈했거나 뿌듯했거나 초라했던 짧고 긴 길의 여정에 주목하려 합니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한국에서 식물을 채집한 표본으로 가장 초기 기록 중 하나를 뒤쫓아 부산항에 다녀왔습니다. 영국 왕립 식물원의 조수였던 찰스 윌포드(Charles Wilford)가 1859년경 한국의 거문도와 부산에 방문해 식물을 채집했다는 기록이 있고, 그의 표본들 중 내가 참조한 것은 그가 ‘Port Chusan’에서 채집했다고 기록한 머루의 한 종류(Vitis heyneana)입니다.
이재모피자가 먹고 싶은 친구와 어찌되었든 발로 산을 타야 할 것 같은 내가 만나 윌포드씨의 발자취를 어설프게 따라하는 여정이 있었습니다. 이미지와 좌표와 식물로 구성된 그의 표본에 다른 발걸음과 상념이 덧씌워진 160여 년의 간격이 있는 여정 속에서, 동일한 참조점(부산항의 머루)을 가졌지만 윌포드가 만든 기록과 내가 만든 기록은 다른 이름과 형태를 가집니다. 이 전시가 명확한 도착지를 제시하지 않더라도, 스치듯 떠오른 감각들이 각자의 기억 속에서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 내기를 바랍니다.
《주우러 가는 길》
작가: 최시은 @rooibos_yogurt
주최/주관: 최시은
협력: 갤러리 지하
후원: 경기도, 경기도미래세대재단
* 본 전시는 2025 경기청년 갭이어 프로그램 선정 및 지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25. 09. 29. - 25. 10. 05.
12:00 - 19:00
gallery JIHA, B1, 15, Seogang-ro 11-gil, Se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