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다은, Fragile Nostalgia_01, 2025. 캔버스에 유채, 45.5x33.4>
<송다은, Fragile Nostalgia_02, 2025. 판넬에 색연필, 20x20>
슬픔.
”기억의 잔상, 사라지는 것들”
미디어는 영원할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하드디스크는 손상될 수 있고, USB는 쉽게 망가진다. 저장된 데이터는 한순간에 읽을 수 없는 파일이 되어버린다. 기술이 발전할 수록 새로운 기기가 등장하고, 과거의 포맷은 지원되지 않으며, 결국 우리는 우리가 만든 기록을 스스로 해석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간다. 기록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읽을 수 없을 때,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리는가?
이 작업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탐구다. 폴라로이드와 DSLR로 촬영한 후 인화된 사진을 기반으로 하지만, 완전한 형태로 남겨두지 않았다. 흐릿한 형상, 지워진 흔적, 미완성된 장면들. 개인의 역사와 추억도 이와 다르지 않다. 기술의 변화 속에서 소외되는 것들처럼, 우리의 기억도 점차 희미해지고, 감정조차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상실 속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애도하며,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가? 이 작업은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 우리가 지켜가야 할 질문을 남기고자 한다.
《무형의 울림》
작가: 김민창 @m_i_n___c , 박소현 _plily_5 , 박혜주 @_aejoo , 송다은 @roxaolo_7 , 유은아 yueuna227 , 윤해원 @moon_two03 , 한유화 @yuhwa_works
사진: 갤러리 지하 @gallery_jiha
25. 02. 17. - 25. 02. 23.
12:00 - 19:00
gallery JIHA, B1, 15, Seogang-ro 11-gil, Seoul
구구 개인전
내 마음이 어중간한 크기라 느낄 때
시각 예술을 비롯한 전반적인 전시 관람의 제1 목적은 중층적 경험을 향유하는 것에 있다고 작가는 생각한다. 자유로우면서도 일관적으로 작품을 독대하는 과정을 거치며 관람객들은 다른 이들과 차별된 푼크툼(punctum)을 겪을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내면의 무언가를 고취하는 것을 시작으로 예술적 경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도 예술이 대중들에게 어려운 데에는 ‘저맥락(low-context) 문화’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있다. 명시적인 언어 기술 및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통한 관련 지식을 습득하여 다양한 코드를 독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한정되었다는 특성은 스스로를 고급문화의틀에 가두어 버린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작품을 통해 순수미술 영역에서 다루지 못하던 하위문화(캐릭터)를 적극적으로 포용하여 대중들에게 선사한다.
작가의 작품이 전시될 전시장의 한 구석에서는, 그것이 무엇을 표상했는지 의심할 여지가 없이 관객들에게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간접적인 메시지를 통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 다양한 코드를 자연히 이해하고 공유하는 과정을 거치며 ‘고맥락(high-context) 문화’적 전시를 꾀한다.
L.N.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의 예술론에서는 예술을 이렇게 정의한다. 언어가 의사를 소통하기 위한 매체이듯이, 예술은 ‘감정을 소통하기 위한 매체’라고. 이어 감정의 소통을 그는 ‘감염’이라고 부른다. 즉 그에게 있어 예술 활동은 “인간이 남의 마음에 감염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동일한 감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지각자로 하여금 창작자의 감정을 공유하게 만들고, 상이한 지각자들이 서로의 감정을 나누어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 예술론에서 제시한 감염의 요건 세 가지, ①독창성 ②(표현 방식의) 적절성 ③성실성을 근거로 하여 감정을 소통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마따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개인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하에 존재하며 이것은 본능에 기인한다. 고로 개인은 사회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커뮤니케이션, 즉 같이 이야기하고 대담, 협의를 통해 감정을 나누고 인격체로서 인정받는다. 이러한 의사소통 과정에서 감정을 나누는데 필요조건은 단연코 표정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표정은 학습된 게 아니라 타고난 것이다. 그것은 문화와 관계없이 사람들 사이에서 비슷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진화적인 기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물론 감정을 유추하기 위해서는 당시 상황의 맥락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기본 감정 여섯 가지인 기쁨, 공포, 혐오, 분노. 놀람, 그리고 슬픔을 눈치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무표정’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이 화두를 던지는 것이 작가가 작품으로 하여금 얘기하는 핵심 주제이다. 정색은 대개 심기가 불편하다든지, 무언가 반대한다는 의미의 부정적인 성격으로 해석된다. 심리적인 공격에 대한 방어기제로도 볼 수 있다. 인상에 따라 위압감이나 공포를 느낄 수도 있으며, 일종의 사전경고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표정을 바라보며 관찰자는 자신이 한 행동 등을 상기할 수도 있다. 이러한 양상을 띠는 이유는 무표정을 해석하는, 다시 말해 타인의 감정을 알아내기 위해서라고 보이며,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에 장애를 느끼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작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표정이 감정을 감염시키는 데 있어 증폭시킬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표정을 가진 캐릭터(페르소나; persona)를 작품에 삽입함으로써 톨스토이가 제시한 예술론에 충족 조건을 완수한다. 관람자들은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며 캐릭터의 감정을 해석하기 위해 공상하며 무언가를 상기하는 과정을 가질 것이다.
중앙대학교 예술학부 서양화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대학원 조형예술학부 서양화전공 재학